위기 속에서 기회를 만들던 삼성,
지금은 왜 주춤하는가?
모두가 삼성전자의 위기를 말한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위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삼성은 언제나 위기였다. 다만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KBS에서 2024년 3월 방송된 다큐멘터리 <삼성, 잃어버린 10년>은 삼성전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루고 있다. 이 다큐를 만든 서영민 기자는 미국 실리콘밸리부터 용인시 기흥구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부터 베스트셀러 《칩 워》를 쓴 크리스 밀러, 실리콘밸리 반도체 설계의 전설 짐 켈러, 삼성전자의 전현직자와 업계·학계·금융계 인사들을 만났다. 삼성이 반도체 산업의 강자로 발돋움하게 된 과정과 AI 시대를 여는 반도체 산업의 과제를 묻고 들었다. 방송 이후 삼성의 두 번째 사과로 삼성전자가 새로운 국면을 맞은 후 다큐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과 추가 취재한 내용을 포함하여 이 책을 썼다. 삼성전자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던 힘은 어디서 왔으며 지금은 왜 그 힘이 희미해졌는지를 파헤친다.
1983년 삼성전자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당시의 기술력은 기존 업체들에 6년 정도 뒤처져 있었다.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키우기 위해 다른 사업에서 거둔 수익을 모두 투자했지만 이익은커녕 엄청난 손실만 입었다. 하지만 삼성은 계속 투자했다. 반도체 사이클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황에도 과감히 베팅했다. 거대한 투자를 하고 그에 따른 위기의식과 긴장감에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밤낮없이 기술을 개발했고 인재를 영입했다. 혁신적인 기술로 목표를 달성하면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다시 크게 투자를 하고 위기의식을 가지고 고삐를 죄었다.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힘은 다름 아닌 ‘위기감’이었다.
두 번의 사과에 비친 삼성 위기의 전말과
과거의 삼성 vs. 지금의 삼성
이 책의 1부는 두 개의 사건에 주목하며 시작한다. 2022년 3월 GOS 앱 업데이트 사태에 관한 사과와 2024년 10월에 전격적으로 나온 사과다. 이 두 번의 사과는 삼성이 처해 있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0년간 최고의 자리를 지키던 메모리 제조 기술은 물론, 반도체 설계, 파운드리,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삼성전자의 주력 사업 모두가 위기임을 말하고 있다.
삼성이 과거에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해답은 2부에 실려 있다. 삼성 번영의 역사에서 찾는다. 가장 먼저, 과거의 삼성은 거대한 투자와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밀어붙인 리더십이 있었다. D램 사이클을 잘 활용했고, 양산 능력을 갖춰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현재의 삼성은 D램 제조 미세화의 한계에 부딪혔다. 당장의 수익에 사로잡혀 혁신 기술 개발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HBM 등 벽에 부딪힌 메모리 미세화를 우회할 만한 다른 기술을 충분히 연구하지 못했다.
과거의 삼성은 D램 제조에서의 성공 경험을 활용하여 LCD, 플래시 메모리 등의 다른 사업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뒀고 이는 다시 반도체 사업의 투자 역량으로 이어졌다. 현재의 삼성은 파운드리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D램 제조와 파운드리는 패러다임이 완전히 다르다. 만들어 놓고 팔면 되는 기성품과 고객사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맞춤 반도체 제조의 특성이 같을 리 만무하다.
과거의 삼성은 198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PC가 확산하던 초입에 반도체 메모리 사업에 진입했고, 일본을 견제하는 미국의 지정학적 논리에 따라 삼성은 시장과 기술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의 삼성은 완전히 다른 지정학적 세계에 놓여 있다. 반도체 기술을 국가 안보로 지정하고 미국은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압박하고 있다. 중국은 독자적인 반도체 체제를 갖추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딥시크의 등장과 중국의 반도체 독립 등 중국의 추격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삼성전자의 세계 시장은 점차 좁아지고 있다. 이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이 삼성의 현실이다.
미래를 결정할 시그널은 무엇인가?
삼성과 대한민국에 변화와 혁신을 묻다!
이 책은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삼성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업의 흥망성쇠의 시계를 되돌려 다시 비상하기 위한 조건을 알아본다. 삼성이 이것을 해내면 재도약의 시그널이 될 것이고, 해내지 못한다면 쇠락의 시그널이 될 것이다. 경영과 사업 운용, 인재 관리에 대한 가치관과 관념을 완전히 새로이 해야 하는 일이다. 또한 이는 대한민국에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삼성의 성공과 실패가 대한민국 경제에 미치는 파장을 고려한다면 무리는 아닐 터다. 이 책은 결국 삼성을 위한 책이 아니다. 다음 시대의 혁신과 성장을 위해 지금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묻고 있는 책이다.
▶ 책 속으로
삼성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SK하이닉스는 만들어서 납품하는 이 HBM을 삼성이 못 만듭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만들긴 만드는데, 삼성 제품의 성능에 엔비디아가 만족하지 않습니다. 엔비디아 퀄(퀄리피케이션: 성능테스트를 의미합니다)을 여러 차례 통과하지 못합니다. 삼성의 수율이 충격적으로 낮다는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2024년 3월 이 상황을 묘사하며 쓴 기사가 있습니다. 제목은 이렇습니다. ‘엔비디아가 이름을 불러주자 활짝 핀 삼성전자’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가 ‘삼성은 훌륭한 기업이고, 우리가 지금 삼성의 HBM을 테스트하고 있다’고 말하자 삼성 주가가 급등합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퀄 테스트 통과’ 소식이 안 들리니까 주가는 다시 흘러내립니다. 납품하겠거니 생각한 시점인 8월이 되자 다시 주가가 오르다가, 소식이 없으니 떨어집니다. 시장의 기대가 출렁거립니다. pp.52-53
맞춤형 HBM은 메모리 공장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메모리 회사를 떠나 파운드리 회사로 가서 첨단패키징 후공정(AVP)을 거쳐야 합니다. 앞으로 HBM은 점점 더 파운드리 제품처럼 변해갑니다. 아예 두뇌(GPU와 기타 AI 반도체)가 또 변할 겁니다. 새로운 혁신을 위해 환골탈태할 것이고, 이때 두뇌는 새로운 손발(메모리)을 필요로 할 겁니다. 메모리라는 손발이 두뇌와 같은 칩 위에서 작동하고, 두뇌와 상호작용하면서 마치 한 몸처럼 결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여튼 HBM이 메모리의 최종 형태는 아닐 겁니다. 이미 다 만든 제품을 그냥 물리적으로 쌓아놓은 형태라니, 어쩐지 중간 과정의 임시방편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p.59
2019년 3월, 1z D램 개발을 끝으로 삼성의 ‘세계 최초’ 기록은 5년째 멈춘 상태입니다. 일각에선 제조 문제가 아닌 설계상의 결함 의혹을 제기합니다. 멈추게 된 이유가 근본적인 데 있다는 보도도 나옵니다. 그래서 5세대(1b)뿐 아니라 4세대(1a) D램도 설계를 재검토한다는 보도까지 나옵니다. 특히 위 보도에 인용된 삼성 내부의 반성 목소리는 충격적입니다. “1a D램의 양산을 시작할 때 수율이 충분히 높지 않은 상태에서 EUV 장비를 경쟁사보다 더 쓰는 방식으로 땜질 처방을 했다”는 겁니다. 설계의 문제, 혹은 공정 프로세스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더 좋은 장비에 의존해 문제를 미봉했다는 것이죠. 사실이라면 이제라도 그 덮어놓았던 문제를 다시 풀어 헤쳐서 수율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p.69
사실 기업 경영의 역사를 보면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습니다. 한 시절을 풍미한 대기업이 사그라들 때, 그 소멸의 중력을 박차고 다시 부활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뒤안길로 사라지는 장면에는 ‘소프트 랜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너지를 다 쏟아낸 기업은 성장이 서서히 둔화되는 것이 아니라 절벽에서 떨어뜨린 돌처럼 급격히 추락합니다. 기업 역사에 점진적인 하강은 없습니다. 거대 기업의 성장이 왜 정체하는지를 연구한 매튜 S. 올슨, 데릭 C. M. 반 베버, 세스 베리가 1955년에서 2006년 사이 정체를 경험한 포천 100대 기업과 글로벌 100대 기업, 500개를 조사한 뒤에 낸 결론입니다. 물론 기회가 없다고 말하기는 이른 시점입니다. 이 책도 기회가 없음을 역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의 목적은 이제 남은 가능성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겁니다. pp.77-78
《칩 워》를 쓴 크리스 밀러는 중요한 건 ‘경제학’이라고 말합니다. 무어의 법칙은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가 1965년 발표한 이론입니다. 무어는 10년 정도 예측했는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기술이나 물리학이 아니라 경제학에 의해서죠. 컴퓨팅 파워에 대한 수요는 매우 높기 때문에 더 많은 컴퓨팅 파워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 성공한 기업가가 됩니다. 투자자, 개발자, 기업이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게 만드는 이유죠. 엔비디아의 기업 가치는 1조 달러가 넘습니다. AI 기술에 필요한 최첨단 컴퓨팅 파워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죠. 결국 무어의 법칙은 기술의 표피를 한 기업 생존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매우 잔인한 생존법칙입니다. pp.94-95
2016년 10나노대 공정에 처음(1x) 들어선 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0나노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나마도 최신 6세대 1c공정은 SK하이닉스만 공식적으로 수율과 품질의 측면에서 양산 단계에 들어섰다고 발표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다음 공정도 10나노입니다. 10나노 7세대, 1d 공정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는 1나노 전진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9나노 이후로는 더 이상 미세화로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가능할지는 몰라도, 경제적으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너무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죠. 메모리칩 미세화는 이렇게 한계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pp.137-138
삼성이 TSMC를 쫓아가려면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최초의 설계도를 끊임없는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맞춤형 접근법도 다양하게 연구해야 하겠죠.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우선은 고객과 함께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소통과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TSMC 대비 부족한 IP도 충분히 확보해야 합니다. 고객에게 더 나은 선택지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협력의 생태계도 구축해야 합니다. 모리스 창이 그은 빨간 선을 보면 아시겠지만, 설계 뒤 제조의 모든 영역을 파운드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패키징 공정이나, 신공정의 경우 돌파구가 파운드리 바깥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HBM이 그렇습니다. SK하이닉스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일본의 신소재 기업, 한미반도체 등 협력사와 함께 돌파구를 만들어 냈지요. pp.164-165
2024년 10월에서야 공식적으로 인정된 D램 제조의 위기가 사실은 5년 전부터 쉬쉬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2024년 하반기에 만난 삼성전자 생산라인의 중간 간부는 ‘D램 제조와 관련한 이상 신호는 2019년부터 나타났다고 증언합니다. GOS 논란, HBM과 D램 위기는 모두 기술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문제를 축소하려는 대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근본적 문제 해결보다 단기적 수익과 이미지에 치중한 결과입니다. 결국, 위대한 기업은 문제를 직시하고, 내부 경고를 수용하며, 단기적 수익보다 지속 가능한 성장에 집중할 때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삼성은 이러한 교훈을 되새겨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pp.211-212
청년의 절대 인구 자체는 줄고 있습니다만,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수도권이라는 제한된 공간에만 기회가 있기 때문에, 청년들은 극도로 높은 밀도로 뭉쳐서 살아갑니다. 경쟁은 과거보다 더 치열하고, 낙오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대다수 청년의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선택을 ‘젊고 싱싱하고 혁신적인 에너지가 있는 청년’에게 권유하기 위해서는 이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발적 동기부여가 가능해질 때, 폭발적인 에너지가 나올 겁니다. 지금 삼성전자에는,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그런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p.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