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생은 미국에 한번 가보고 싶어서 일하러 가는 구만
- 실리콘 밸리의 한 사장님
정말 그랬던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공부하러 가기엔 뭔가 석연치 않고, 돈도 벌고 세상 물정도 안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하는 간단한 이해가 남들에게는 어쩐지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지 반성까지 드는군요. 아무튼 실리콘 밸리는 가지 못했습니다.
작년 10월경 나우누리 자바 동호회에는 저의 시선을 끄는 구인의 글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라… 휴대폰용 자바 게임이라…”
제가 자바 실무(이하 업계)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99년 8월말, 대학을 코스모스 졸업하고 난 다음날이었습니다. 대학원 입학까지 반년 정도의 공백이 주어졌고, 당시 어려웠던 개인 재정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려던 차, 마침 프로그래머로서의 일이 눈앞에 보였던 것입니다.
운이 좋았던지 면접을 하셨던 분은 저를 바로 고용했고, 약 2개월간 일을 배우며 했습니다. 그때 만났던 분들은 어떻게 보면 은인인데, 업계의 밑바닥을 그리 힘들지 않게 발 디딜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하지만 견습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후 바로 투입된 프로젝트는 모 재벌의 계열사 종합 포탈 사이트!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는데, ‘혹시 우리가 희생양이나 볼모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의사결정의 연속이었습니다. 다행이 험한 꼴 보지 않고 한달 정도에 끝내버렸지요.
그리고는 좀 쉬다가 한 벤처 사업가로부터 벼룩시장 사이트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고 후다닥 해치워 버렸습니다. 뭐 규모가 작으니까 그럴 수 있었지만 그때부터 작업은 외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동안 자바와 웹 애플리케이션의 업계에서 구르는 동안 “이 바닥”에는 사람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다들 기다리는 새천년은 그래서 더 쓸쓸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있다. 운명. 그것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니 삶과 죽음, 그리고 희망과 절망을 모두 떠안고 쉴 사이 없이 싸우는 전사. 그들에게는 운명조차 싸움의 대상일 뿐이다.
- 만화 “베르세르크”의 오프닝
용병의 세계를 알게 되어갔습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해 보았자 사실은 “프리랜서”니 “아르바이트”니 “계약직”이니 하며 부르는 그렇고 그런 직업 아닌 직업이지만, 나름대로 애환도 사연도 많습니다. 사실 업계에서 용병으로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작년 봄 시작한 전투(프로젝트)는 한 달 만에 끝내겠다고 호언했지만 결국 한 계절이나 지나서야 겨우겨우 성을 함락하고(사이트를 만들고) 보수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전장을 물러났으니까요.
전선에 투입 되었을 때 전황은 참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전투 경험이 없는 사령관(팀장) 한명, 이제 막 신병 교육을 마치고 온 병사(개발자) 한명, 거기에 비하면 적들(고객)은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고지식한 정부군(공무원)에다가 막대한 숫자(상대할 고객수가 많음. 즉 대화의 채널이 일원화 안 되어있다는 뜻임), 오랜 수성의 경험(유연한 사고 따위는 천지개벽해도 안보일 것 같음) 등 누구도 그 전선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상황이 더 매력적이더군요. 쉬운 쪽은 아무래도 성취감도 덜하고, 깨닫는 것도 적으니까, 용병으로 성장하려면 스스로 험한 전투를 통해 강해져야 한다는 호기까지 있었나봅니다. 게다가 의뢰인의 간곡함과 보수의 두둑함도 저를 어리석은 판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전선은 서울 대학로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여느 전선과는 달리 주변 풍토가 너무도 좋았습니다. 낭만적이었지요. 전투는 하루하루 교착상태에 빠지며 상부의 문책으로 몹시 시달렸지만, 주위 풍광과 마을 주민들의 따뜻함이 그나마 견디어 나가게 해주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때 전략전술(프로젝트 수행이론)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자바 웹 애플리케이션 제작”이라는 큰 칼을 가지고 있더라도, 전투는 혼자 할지라도,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국의 지원도 적시적소에 따라주지 않고, 병사는 제 몫을 다해내지 못하고, 사령관은 상부와 전선 사이에서 고뇌하니, 용병이지만 기사로서 전장을 지휘하는 것은 당연히도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어렵다”, “도와 달라”는 함성이 가득한데 몸은 하나이고, 시간은 흐르고, 힘은 빠지고, 이제 돈도 성취도 다 필요 없으니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그런데다 저는 다소 무리한 욕심까지 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모델 2”라는 전술을 도입한 것이죠. 지금은 자바 웹 애플리케이션 설계 모델의 표준으로 자리 잡을 정도로 선전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이것이 실제 상황에서 쓰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이런 전투(소규모의 인원)에서 말이지요. 신병은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훈련소에서 배운 것과는 너무도 다른 전장의 상황에서 불만이 폭발했고 사기는 떨어져만 갔습니다. 상관도 아니고 용병인 내가 과연 이 친구와 전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무진 고민을 했는데, 다행이 이 친구는 독실한 종교인이었고, 불평은 있을지언정 긍정적인 사고는 버리지 않는 천만 다행한 점이 있었습니다.
사령관도 차츰 안정을 찾고 자신의 전문분야인 보고(프로젝트 시연)와 병사 지원(사원관리)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더 없이 좋은 분이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상부에서 한지로 몰아낸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공성(프로젝트 검수)을 마친 후 귀환하시면서 웃으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그렇게 힘든 시간이 2000년의 여름마저 삼키어버렸습니다.
나는 시간의 여행자. 젊은 청춘들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지. 그들은 다들 꿈을 찾아 나서지만, 여행의 종착지에서 발견하는 것은 다 커버린 자기 자신이야. 내가 동행하는 것은 거기까지지. 그이후의 그들의 여행은 혼자서 해야 해.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야.
- 은하철도 999, 메텔
점점 웹 삽질-웹 프로그래밍이라는 고상한 말이 있지만 역시 단순 반복의 노동이라는 뜻에서 삽질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고 입맛에 딱 맞습니다.-에 지겨워질 무렵, 저에게는 꽤 흥미로운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단지 조그만 애플릿의 디버깅(수정보완)이었는데, 실제 상황을 보니 그리 답답한 지경은 아니었습니다. 간단히 약속한 기일 내에 임무를 완수하고는 철수하려는데, 묘하게도 그 회사(애플릿을 운영하는)에 정착하고 싶다는 맘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지난 전투에서 너무 지쳤고, 용병생활에도 회의가 들었던지, 정규군으로는 다소 받기 힘든 훌륭한 대우와 인간적인 접근에 선뜻 악수를 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 하게 된 정식 입사의 첫 회사생활은 그토록 원했던 안정만을 선사하지는 않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회사는 저에게 제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시키려 한다는 것이었죠. 용병으로 생활한지 근 1년, 이미 익을 데로 익은 자유로운 정신이 그토록 강하게 저항할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회사는 때가 때인지라 점차 인터넷 벤처기업들의 몰락과 함께 기울어져 갔고, 따라서 저에게 제시했던 초기의 근사한 이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결정했죠. 자체 구조조정 하기로 말이지요. 회사에 ‘왜 이 회사는 자바 기술을 포기해야하는가’란 보고서를 제출하고는 홀연히 짐을 싸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인연은 그리 쉽게 끊기는 것이 아니라서 ‘백의종군’의 형식으로 그 후에 상당기간 돌봐주며 관심을 가진 걸로 책임과 애정을 다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Love is the message
- 3집 앨범 타이틀, MISIA
자바에서 J2EE계열, 혹은 서버 사이드(Server Side), 백 엔드(Back End), 서블릿(Serlvet), JSP로 불리는 분야와 기술을 큰 칼로 비유한다면, 클라언트 사이드(Client Side), 프론트 엔드(Front End)로 불리는 J2SE는 기본기, 그리고 J2ME계열, 즉 요새 뜨고 있는 모바일 자바 쪽은 거의 맨주먹 수준입니다.
저는 묘하게도 큰 칼을 쓰는 법을 먼저 배우고 말았는데, 실제로 업계의 일 대부분이 성을 공격하는 전투(사이트 구축)였기 때문이었죠. 무기개발(J2SE: 순수 자바 애플리케이션)이나 신호전달(J2ME: 핸드폰용 프로그램) 쪽 일은 흔치 않았던 시절이 얼마 전이었습니다. J2EE쪽은 사실 이미 뛰어난 장수들과 무사들이 많았습니다. 정규군 쪽도 많았고, 용병들도 그러했습니다. 불행히 이런 동업자들과 함께 싸워보진 못했지만, 그들의 무용담을 듣노라면 부러움과 회의가 희비쌍곡선을 그렸지요. 그 쪽은 또한 훌륭한 교관들도 있었습니다. 첫 퇴사 후 잠시 쉬면서 받은 훈련에서 만난 교관은 실로 본받을 만한 분이었는데, 저에게 교관의 꿈을 더욱 뚜렷이 각인시켜주셨습니다.
훈련장에서 만난 같은 훈련병들도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점차 느끼게 된 것은 이 바닥이 돈이 벌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점점 많은 소작농과 도시 빈민, 그리고 추락한 기사들이 몰려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시장은 추악해지기 시작했지요. 실제로 그런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이 곳을 떠나기로 말입니다. 역시 힘들겠지만 새로운 곳으로 가야한다는 건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이 쉬운 곳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사랑은 쉽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에 대한 메시지였지요. 어서 오라는......
어디서도 함께
-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SCE)의 게임명
실로 일본은 신기한 세상이었습니다. 온통 칼라 액정의 핸드폰으로 뭔가를 하는데, 이번에 제가 들어간 회사도 바로 그 시장에 잠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일하러 도착했을 때의 상황은 아주 막막했습니다. i-애플리(i-appli)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NTT-도코모의 자바 프로그램 제공 서비스는 개발자에게는 정말로 "뭘 하라는 소리?"라는 물음이 나올 정도로 아주 깜깜했습니다. 오히려 자바 정보 잡지와 개발자 커뮤니티, 개인 개발자들이 발 벗고 나섰는데 그들의 도움은 눈물겨울 정도로 감사할 뿐입니다.
지난 벤처기업에서도 일하면서 들은 얘기인데, 거대 이동 통신 사업자들의 고압적인 자세와 경직된 업무 관행은 공무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는 말을 듣고 새롭지는 않지만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그런 식으로 해도 일이 잘 되는데… 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항상 고름은 안에서 밖으로 터지는 것이죠. NTT-도코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우선 시급한 것은 개발 환경 구축이었습니다. 공개된 것이라고는 개발API와 API 명세, 즉 수박의 껍질만을 던져주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한동안 썬(Sun Microsystems)이 제공하는 표준 개발툴로 일하다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연히 혹시나 해서 동네 큰 서점에 들렸는데 운 좋게 대어를 낚았습니다.
일본에는 “자바 월드(Java World)”라는 자바 전문 월간지가 있었습니다. 이것의 4월호에 i-애플리용 개발 환경에 대한 특집이 실린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았을 때의 반가움이란 마치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수준이 아니었을까요? 책이 비싼 것은 생각도 안하고 냉큼 가져와서 제대로 된 개발에 착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아마 3월 초쯤이었던 것 같군요.
그리고 약 일주일간 뭔가 되는 걸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일은 대충 이랬습니다. 기획자가 게임을 구상하여 기획서를 작성합니다. 일단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면 저와 상의를 합니다. 기획의 틀을 잡아놓고 작업은 양쪽으로 들어가는 거죠. 워낙 이쪽이 시간 싸움인지라 순서대로 할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일단은 기본적인 구성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고는, 제가 먼저 테스트해보고 나서 기획자에게 보여줍니다. 기획자는 자신이 의도했던 바와 맞추어보고 저에게 피드백을 줍니다. 점차 구체적인 프로그램의 윤곽이 드러나고, 평가의 수위도 올라가죠. 어느 정도 기획자가 만족하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개발자인 제가 욕심이 생깁니다. 더 잘 만들고 싶은 거겠죠.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봅시다. 게임에는 그래픽이 필수입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우선 기획의 바탕이 되는 캐릭터와 모션에 대한 그림을 그려놓습니다. 개발자는 그것을 가져다 쓰는 것이죠. 이 그림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데, 여러 방향으로 조율하게 됩니다. 그림의 크기가 색상의 폭, 움직임을 부각시키는 방법까지, 무척이나 밀착된 작업이지요.
자바 기술적인 이야기도 해보죠. J2ME에는 기본적으로 CLDC라는 구성(Configuration)이 있습니다. 자바에서는 플랫폼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자바 애플리케이션의 실행 환경(Runtime Environment)의 정치적 용어로 봐도 무방할 겁니다. J2ME에서는 이 플랫폼을 두 층(Layer)으로 나눕니다. 플랫폼의 아래층을 구성(Configuration)이라고 하고 위층을 프로파일(Profile)이라고 합니다. CLDC는 구성중 비교적 작고 제한된 기기에 탑재되는 것을 뜻하는데 보통 이동 통신기기도 바로 CLDC를 기반으로 합니다.
대체로 여기까지는 이견이 없는데, 프로파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썬에서는 MIDP(Mobile Device Profile)이라는 것을 내놓았는데, 업계의 강제되는 표준은 아닌지라, NTT에서는 DoJa라는 독자 프로파일로 i-애플리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일본 제 2의 이동통신망인 J-Phone은 MIDP를 쓴다는군요.
따라서 i-애플리용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면 CLDC와 DoJa라이브러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DoJa라이브러리의 스펙만이 오랫동안 공개되었었는데 최근에 라이브러리 클래스와 개발툴도 공개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중소 개발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근데 고난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통상 이러한 개발에서는 매번 테스트 때마다 실제 핸드폰에 올려놓게 한다는 것은 비효율의 상징이므로 에뮬레이터라는 가상의 핸드폰 프로그램을 쓰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도 역시 종전까지 NTT에 의해 공식적으로 배포되지 않았었는데, 다행이도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몇몇 개발사와 개인이 그 어려운 역사를 해내었습니다.
저는 I-Jade라는 에뮬레이터를 사용했습니다. 기특하게도 DoJa라이브러리도 NTT가 공개하기 전에 구현하여 만들어놓을 정도로 기술력도 뛰어난 Zentek이라는 일본 회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사실 이회사와는 전혀 개인적인 친분도 없지만 왠지 기분 좋은 회사군요. 이외에도 몇몇 에뮬레이터들이 있습니다만, I-jade만큼 본격적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I-jade Lite의 경우에는 무료이고 특별한 기능 제한도 없으니 참 대단하군요.
하지만 흉내는 흉내입니다. 저는 실제로 후지쯔에서 만든 F503i 핸드폰 단말기로 최종 테스트를 해 보는데, I-jade에서 잘 돌아갔던 것이 F503i에서는 형편없는 결과를 보여주는 경우가 개발해가면 갈수록 허다합니다. 왜 그런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당장으로서는 심각하겠지요. 특히 혹시 한국에서 i-애플리를 개발한다면 큰일은 큰일입니다. 혹시 한국 개발자들을 위해 테스트를 해주는 전문 업체가 생기지 않을까요? 농담 같은 진담입니다만.
한국의 모바일 개발자들은 i-애플리 프로그램 한 개의 용량이 10킬로바이트, 즉 글자수로 10240개라는 제한에 대해 놀라 자빠지곤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용량에 그런 그림과 효과와 기능을 구현할 수 있냐고요. 이는 역시 일본 개발자들의 혼으로밖엔 설명이 안 될 겁니다. 크게 두 가지 잔머리(?)가 쓰였다고 보는데요, 하나는 스크래치패드라는 i-애플리용 영속 기억공간을 이용한 캐슁 기술과, 또 하나는 자바프로그램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단촐하게 작성할 수밖에 없는 코드 다이어트 기술입니다.
이미 이런 것에 대해서도 여기에서는 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먹고 살려면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 코드를 보면, ‘이것이 자바가 맞을까? 혹시 가비지 콜렉션이 되는 C언어가 아닐까?’하는 자조마저 내뱉게 됩니다.
하여간 대단하다고 밖엔 할 수 없는 기겁할 만한 분위기지만 다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직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킬러 i-애플리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무주공산이라면 무주공산이겠죠. 전무후무한 인기 게임이 한국에서 나올지 어찌 짐작하겠습니까? 미래는 그래서 재밌는 거라고 봅니다.
She’s buying a stairway to heaven
- 노래 “Stairway to heaven”중, 레드 제플린(Led Zepplin)
요새는 한 개발 기간이 끝나서 좀 쉬는 통에 이런 글도 쓰지만, 마냥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보 수집도 개발자의 몫이죠. 그런 뜻에서 지난 30일 열린 춘계 도쿄 게임 쇼는 아주 유익했습니다.
이전까지 일본의 게임 시장은 그야말로 “게임기” 통일 시대였습니다. 가정용이건 휴대용이건 무조건 게임기였죠. PC게임을 주류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릅니다. 아직 인터넷 회선망도 그리 빠르지 않은 편이라 네트워크 게임도 거의 전무한 상태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인터넷을 1993년 대학 입학 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학교나 가야 전용선이 깔려 있었고, 집에서는 전화선이었는데 그 허접함이 하늘을 찌를 정도라는 것은 지금에나 말할 수 있는 사실이지 당시에는 ‘문화충격’ 수준이었습니다. 지금은 사실 인터넷 문화를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데 그러고 보니 그 충격 흡수에 10여년이 걸린 셈이군요.
사실상 일본이 그 상태입니다. ‘최고의 강대국! 선진국!’ 일본이 웬 일이냐 싶겠지만 아픈 속사정에 고소해하기에는 좀 미안한 감도 듭니다. 오히려 1990년대 초에는 일본이 광케이블이니 ISDN이니 하며 아시아와 유럽, 심지어 미국마저 초 긴장상태에 빠뜨렸는데, 어찌된 일인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일본 자체의 여러 딜레마와 함께 굴러 떨어져버렸습니다. 덕분에 ‘빨리빨리’ 정신의 우리나라가 앞섬 아닌 앞섬이 되어버린 것이죠.
일본의 한 전철 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더군요. “일본 인터넷 인구 2000만명” 음… 대단하군. 많아…. 하지만 그 큰 글씨 밑에 이렇게 조그맣게 쓰여 있었습니다. “1억명은 뭐하고 있는 거지?” 맞습니다. 아직 1억명은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이 네트워크 게임을 지원하지 않는 게임기 시장을 건재하게 해준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합니다. 토크쇼에는 그 고명하신 “빌 게이츠”도 왔는데, 워낙 기조연설의 달인인지라 일본인들은 거의 톱스타 취급을 하더군요. 오히려 함께 출연한 다른 일본 업계 거물들이 주눅 들어 보일 정도였습니다.
X-BOX라고 들어보셨는지요? 게임업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들어 보셨을만한 기기묘묘한 영어알파벳의 조합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유난히 X자를 좋아하는데 뭐든 X자를 붙이려 드는 것 같아 우스워 보이기도 합니다(심지어 Active-X도 있었죠. X는 Control을 뜻합니다. 전혀 상관없죠). 그래서 이번 가정용 게임기명에는 X를 두개나 넣은 건가? 뭐 이름이야 아무렴 어떻습니까? 게임만 재밌으면 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3DO라는 게임기로도 미국은 일본진출의 쓴 맛을 본 터라, X-BOX에 대한 조심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역시 문화의 차이는 크더군요. 빌 게이츠가 특별히 소개한 일본시장을 위한 게임기 조절장치-보통 패드라고 부릅니다만-도 동양인의 손 크기에 맞게 줄였다고는 하지만 게임을 해본 기획자 말에 따르면 여전히 크고 불편하답니다. 게다가 데모로 보여준 것들도 그래픽은 “우와”지만 게임은 “으잉”이었습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캐릭터”에 기반한 엔터테인먼트 문화를 지향해왔습니다. 그래야 다양한 구석으로 팔아먹을 수 있지요. 게임만 대단하다면 게임장사로 끝나는 겁니다. 누가 스타크래프트 인형 삽니까? 누가 스타크래프트 음악 시디 사던가요? 스타크래프트 성우는 누구였던가? 데모에서 보여 진 게임들 중에 그리 강한 인상을 주는 캐릭터는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소개장면에서 탄성은 거의 나오지 않았지요(오히려 시큰둥했다고나 할까요?).
기조연설 중 구슬픈 소식도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악재로 우울하기만 한 세가(SEGA)는 조연으로 나오기로 한 대표께서 운명하신 통에 대타로 이사가 나와 몹시 침울한 표정으로 의기를 표명했지만, 세계와 일본을 주름잡던 대 게임 하드 메이커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써드 파티(Third Party)로 전락한 기분이 들어 세가 게임을 즐기는 저로서는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X-BOX는 얼핏 보기에 거의 PC처럼 보입니다. 내부 구성도 거의 흡사하지요. CPU도 INTEL X86에 VGA도 NDIVIA 거기에 하드 디스크까지. 랜카드도 내장되어 있습니다. ADSL이나 전용선을 통해 바로 인터넷과 네트워크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꿈의 기계! 그것을 도와줄 연합군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NTT communication에서 ADSL서비스의 첨병으로 X-BOX를 지목했고, 일본의 유수 게임 제작사인 KONAMI, CAPCOM, TECMO등이 X-BOX용 게임을 내놓기로 약속한 상태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X-BOX에는 장미빛 미래가 보장된 듯하지만, 일본의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아니올시다’입니다. 우선 가장 강력한 방해꾼(?)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가 아니라 오히려 X-BOX보다 어떻게든 선수를 칠 수 밖에 없는 게임산업의 명가 니텐도의 “게임 큐브”입니다. 이미 휴대용 게임기인 “게임보이”로 천하 통일한 상황에서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소니한테 내줬다는 생각이 들지만, 저력은 부는 바람에 사라지지 않나봅니다. 실제로 많은 게임 업계 관계자와 유저들은 X-BOX보다는 게임 큐브에 목마를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마리오도 살아있고, 포켓몬도 살아있으니까요.
소니도 팔짱만 끼고 플스2가 팔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의 소니와 NTT-도코모의 2인3각은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소니의 최고 히트 캐릭터인 “토로”-고양이처럼 생겼는데 말도 잘 합니다-를 이용한 아이모드(I-Mode)연동 게임인 “아이모드도 함께”가 내달 발매됩니다. 어떤 식이냐 하면, 플스나 플스2를 아이모드 단말기인 핸드폰과 특제 케이블로 연결하여, 텔레비전을 통해 핸드폰 정보를 보거나 수정, 혹은 게임의 정보를 핸드폰으로 올려 연동하는 재미도 더해주는 거죠. 게다가 “토로” 캐릭터가 늘 붙어 다니기까지, 귀여운 거 좋아하는 많은 일본인들의 주머니는 이제 저당 잡힌 겁니다.
이리해서 이번 게임쇼는 NTT-도코모가 당당히 게임 시장의 한 축을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빅 이벤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가정용 게임기와 휴대용 게임기에서 핸드폰과 네트워크로. 그 전조는 무척이나 요란했습니다.
늘 오늘 같을 수는 없죠.
-기억 안나는 한 프로 스포츠 선수
벌써 3월도 끝나는 종을 쳤습니다. 한국도 일본도 겨울이 시샘이 아직도 남았는지 눈도 오고 그러네요. 하지만 훈풍은 역시 몰아닥칠 겁니다. 벚꽃도 피고요. 게임업계는 사실 무척이나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이동통신이야 이제 시작하는 산업이니까 추위를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게임업계로서는 그쪽 손을 꼭 잡고 싶을 겁니다.
저랑 함께 일하는 기획자는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2년간 일본에서 일본어와 게임을 공부하고는 이제 업계에 뛰어들었죠. 사무실 겸 살림집에서 저랑 둘이 사는 셈인데, 뭐 출퇴근 시간을 따로 안 잡아도 되니까 좋지요(누군가는 뛰면 10초라고도 합니다. 참고로 10시 출근 19시 퇴근). 이분은 이사이고 저는 평사원입니다. 나이도 저보다 어리고, 힘들게 구한 기술자라 저에게 나름대로는 잘 대해주지만 흡족하지 못한 면도 있습니다. 회사는 역시 경영이니까요. 일본인 사장님도 무척 열성적이시기는 하지만, 이분야 전문가는 아닌 통에 고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안개속 상황인지라 일본인 그래픽 디자이너는 조금 불안해하기도 하더군요. 그니까 결국 4명이 일하는 겁니다, 우리 회사는....
단촐하지 않습니까? 보통은 3명이서 비좁은 사무실에 앉아 뭔가를 하는 건데, 솔직히 ‘잘 될까?’하는 의구심 자주 듭니다. 제가 이 정도인데 윗분들은 더 하시겠죠. ‘스트레스 받지 말자’, ‘경영에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자기 일에 충실 하는 자세, 나쁘다고 바라보지 말아주세요.
요즘은 일본어가 팍팍 늘어 기분은 좋습니다. 평소에 꿈이었던 ‘일본어로 된 게임 부담 없이하기’가 이루어 질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열심히 EBS일본어 회화 CD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용병의 휴식도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습니다요.
- 불멸의 용병 이아스(IAS) 올림.